음력으로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벌써 1년이나 되었다. 상복을 입는 첫 장례식이였다. 여러모로 장례식은 생각보다 덜 슬프면서 또 생각보다 더 슬프고 무서운 과정이였다. 정신없이 손님을 맞이하다가도, 불쑥 불쑥 덮치던 슬픔들을 그저 버티던 시간이였다. 그런 시간들이 벌써 1년이나 지났다. 새삼스레 쉬지않고 돌아가는 시계바늘이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였다.
할머니네는 전주 옆에 진안군 산골짜기 아주 구석진 곳에 있다. 도로 옆 뜬금 없이 있는 담벼락 뒤에 숨어있는 집이다. 옆에는 아주 멋진 목련나무가 있는데 꽃이 만개했을 때 모습이 아주 장관이다.
기일 당일에 누나랑 기차 타고 전주역으로 갔다. 누나가 기차 예약을 참 이상하게 했다. srt 였다가 ktx 였다가 7시였다가 7시 30분이였다가 40분이였다가 수서역이였다가 용산역이였다가 서울역이였다가 기차를 타기 직전까지 도대체 어떤 기차를 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주역에 내렸더니, 막내 삼촌한테 보이스톡이 왔다. 보이스톡을 받으니 거의 바로 앞에서 “준하야 너 어디야?” 가 육성으로 들려왔다. 삼촌도 비슷한 시간대 기차를 탔던 모양이다. 삼촌은 왜 이렇게 살이 많이 쪘냐며 못 알아봤다고 했다. 할머니네는 전주역에서 버스나 차를 타고 가야한다. 마침 전주에 사는 고모랑 출발하는 시간이 비슷해 차를 얻어타서 갈 수 있었다.
아빠쪽 형제는 지금은 시골을 내려오지 않는 큰 아빠를 포함해 총 7남매다. 집은 좁고 다들 목소리가 커서 꽤 왁자지껄한 연출된다. 정신없지만 가끔씩 재밌을 때가 있다.
도착해서 떡을 나눠먹고 요즘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준하는 왜 이렇게 살이 쪘는지, 아일랜드에 워킹 홀리데이를 간 친척동생 이야기 같은 근황을 나눴다.
할머니네에 가면 꽤 많은게 불편하다. 소파같이 앉을 곳도 딱히 없고 방도 많지 않아서 혼자 있을 곳이 딱히 없다. 에어컨도 없어서 덥고 밥 먹을 때도 매번 큰 식탁을 펴서 쪼그리고 밥을 먹어야한다. 주변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가장 가까운 카페가 차타고 30~40분 정도는 가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리에 꽂히는 감각들이 몇가지 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감나무 밑 평상에서 누워있을 때, 나뭇잎 사이로 빛추는 햇빛
텃밭에서 직접 키운 토마토
숭덩숭덩 대충 썰어 은쟁반 같은 곳에 담긴 수박
집 뒤에 졸졸 흐르는 물소리
밖에서 차가 멈추고 들리는 반가운 목소리
이렇게 까지 감성적으로 쓸 생각은 없었는데 어쨌든 그렇다.
날씨가 꽤 변덕스러웠다. 비가 갑자기 엄청 내리다가도, 갑자기 해가 쨍하니 뜨기도 했다. 원래 계획은 다음날 아침에 산소에 들렸다 서울로 가기로 했는데, 또 언제 비가 다시 많이 올지 몰라서 날씨가 맑을 때 산소를 얼른 다녀왔다. 산소에는 잡초랑 들꽃들이 많이 자라있었다. 할머니가 무덤 밑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잘 상상이 안된다. 작은 할머니가 자기는 여기에 좁아서 못 묻힐거 같다고 했다. 꽤나 매운 농담이였다. 웃으면서 말하시지 않아서 더 매웠다.
집에와서 예배를 드리고 이렇게 할머니 1주기가 끝났다. 사람이 많이 모였으니 순탄치만은 않았다. 한건 없긴 하지만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얘기다. 엉망잔칭이지만 또 그냥 그런대로 잘 굴러간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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